브래스드 오프(Brassed Off)
[2006년 8월 6일 작성]
영화를 만들면서 주제를 너무 드러내려다가는 자칫 재미가 없는 작품이 되어버리고, 재미를 강조하다가는 내용이 부실해지는 일이 왕왕 있습니다. 특히 사회성이 짙은 영화에서 주제와 재미라는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기는 쉽지 않은 일이지요. 1996년 마크 허만이 감독하여 만들어진 영국 영화 '브래스드 오프(Brassed Off)'는 둘 다 놓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둘의 조화까지 완벽한 작품인 듯합니다.
폐광 위기에 몰린 탄광촌을 배경으로 삼고, 광부들로 구성된 브래스 밴드의 단원들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이므로 일종의 음악 영화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 내보이는 주제는 만만치가 않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늘상 벌어지는 자본거와 노동자의 대립, 힘없는 자는 늘 깨지고 좌절하고 무시당하면서 얄팍한 희망에 목을 매고 허덕허덕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비판 등을 다루고 있으니까요. 음악 영화의 탈을 쓴 사회 고발이라고 할까요. 밴드 이야기니만큼 좋은 음악이 많이 나오고, 멋진 연주 장면도 많습니다. 그 중 더욱 인상깊은 장면 셋을 골라서 중간중간 넣으면서 얘기를 꾸며봤습니다. 늘 그렇듯이 스포일러 천지니까 피해가실 분은 여기까지만 읽으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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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요크셔 지방의 '그림리'라는 석탄 탄광은 채산성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폐광될 상황에 처해있습니다. 졸지에 직장을 잃고 백수가 될 처지에 빠진 광부들은 노조를 중심으로 뭉쳐서 폐광 반대를 막아보려 노력합니다. 한편 이 그림리 탄광에는 광부들로 구성된 브라스 밴드가 있는데, 그 역사가 백년도 넘은 유서깊은 악단입니다. 사용자측과 노조측이 협상을 벌이고 있는 그 시간, 밴드 연습실에서는 리더인 대니(피트 포슬쓰웨이트)는 런던에서 열리게 될 전국 경연대회에 나갈 희망을 갖고 단원들을 채근하며 연습에 열을 올리지만, 폐광 문제로 싱숭생숭한 단원들은 도무지 연습할 맛이 나지 않습니다. 이때 연습실에 묘령의 처자가 등장합니다. 예전 밴드의 전설적 멤버였던 노인의 손녀딸이라고 신분을 밝힌 글로리아(타라 피츠제랄드)는 자기도 나팔 좀 분다면서 밴드에 끼워달랍니다. 실력이 어느정도인가 보기위해 함께 한곡 연주해보기로 하는데, 글로리아는 아직 미숙하지만 '아랑훼즈 협주곡'을 한번 불어보겠다는군요. (아래 동영상은 그 연주 장면)
실력과 미모를 겸비한 글로리아의 등장으로 악단은 활기를 띄게되고, 글로리아는 고등학교 동창인 밴드 멤버 앤디(이완 맥그리거)와 사랑에 빠집니다. 하지만 광산의 사정은 더욱 험악해집니다. 회사측에서는 퇴직 보상금을 내걸고 노조의 분열을 획책하고, 회사측에 고용되어 광산의 경제성을 조사하는 일을 맡은 글로리아는 광부측에 유리한 보고서를 내지만 이미 내정된 폐광 방침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그녀가 회사측에서 일하는 신분이라는 것이 단원들에게 알려지면서 갈등이 증폭됩니다. 많은 광부들이 보상금의 유혹에 넘어간 상황에서 폐광 여부를 결정하는 투표일에 밴드는 지역 예선전에 나섭니다. 1위를 하고 의기양양하게 마을로 돌아온 단원들을 기다리는 것은 투표의 패배로 폐광이 결정되었다는 참담한 소식, 리더 대니는 충격을 받아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가고, 심각한 진폐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집니다. (다음 동영상은 단원들이 병원 앞뜰에서 병상에 누운 대니를 위해 '대니 보이'를 연주하는 장면)
폐광 결정에 리더까지 쓰러지자 밴드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에 빠집니다. 앤디는 악기마저 저당잡히고(위 동영상에서 이완 맥그리거가 휘파람만 불고있는 이유가 바로 악기를 잡혀먹었기 때문이죠), 대니의 아들인 필(스티븐 톰킨슨)은 사채업자에게 빌린 돈을 갚지 못해 가구들을 전부 빼앗기고 절망한 아내마저 자식들을 데리고 떠나버리는 상황에 몰려 좌절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기도했다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집니다. 다른 단원들도 실업급여로 연명하며 작은 희망조차 갖지 못하는 상황, 본선이 다가오지만 참가비가 없어 포기할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이때 글로리아가 회사에서 받은 사례금을 참가비로 내놓으며 화해를 청하고, 단원들을 병상에 누워있는 대니를 위해 본선 경연에 도전하기로 결정, 런던의 앨버트홀을 향해 출발합니다. (다음 동영상은 그림리 밴드가 본선에서 '빌헬름텔 서곡'을 연주하는 장면)
(마지막 결말만은 알고싶지 않다면 이 다음 몇 줄을 읽지마세요)
대니는 단원들이 본선에 참가한다는 것을 알고 병상에서 탈출하여 경연장으로 향하고, 연주 도중에 합류하여 응원을 보냅니다. 그림리 밴드는 영예의 1위를 차지하는데, 대니는 뜻밖에도 수상을 거부하겠다는 폭탄선언을 합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자신들의 처지가 뉴스거리가 될것이라며. 그는 정부의 잘못된 산업 정책에 희생된 자신들의 절망감에 대하여 감동적인 연설을 합니다. 그리고 단원들은 버스에 올라 자축하면서 런던 구경을 시작합니다. 의회 건물 앞을 지나며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을 연주하면서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대니는 소망하던 1위를 했고, 앤디와 글로리아는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고, 필은 가족과 다시 합치게 되었습니다. 잘된 일 맞지요. 하지만 그들의 앞날이 어찌 되었을까를 생각해보면 그저 막막할 따름입니다. 밴드는 영광을 뒤로한채 뿔뿔이 흩어질 것이고, 살벌한 현실과 가난과 병마와 싸워나가야겠지요. 영화는 밝은 느낌으로 끝을 맺었지만 남는 여운은 무겁기만 하더군요.
영국 영화들 중에 이 작품과 비슷한 영화가 더러 있지요. 많은 분들이 좋아하시는 '빌리 엘리어트'도 탄광촌이 배경이고 파업 이야기도 큰 줄기 중 하나죠. 사회성은 '브래스드 오프'보다 좀 약합니다만, 여러가지 공통점이 있는 듯하군요.
1997년작인 '풀 몬티'도 '브래스드 오프'와 많이 유사합니다. 제철 공장이 문닫고 실업자가 된 철강 노동자들이 먹고살려고 남성 스트립댄서가 되는 이야기인데, 이 영화도 참 좋습니다. 요놈은 코미디를 가장한 사회 고발성 작품이랄까요.
케네스 로치 감독의 영화들은 사회성 짙기로 정평이 나있지요. 특히 1993년 작품인 '레이닝 스톤'이 '브래스드 오프'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는 듯합니다. 실업자가 딸자식의 성찬식에 쓸 드레스를 마련하려고 물불 안가리고 좌충우돌하는 이야기인데, 역시 유머 속에 감동이 있는 작품입니다.
벽헌
2008/01/06 04:13
2008/01/06 0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