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얇은 허리'는 어떤 모습의 허리?
얼마 전, 점심 먹으면서 케이블 방송을 별생각 없이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한참 전에 방영되었던 오락 프로그램을 줄곧 틀어대는 채널이었는데, '누구누구는 얇은 허리가 매력 포인트 어쩌고저쩌고' 이런 이야기가 얼핏 들리더군요.
'얇은 허리? 이게 대체 뭔 소린가?'라는 의문이 퍼뜩 떠오르더군요. 곰곰 생각해보니, 아마도 '가는 허리'를 '얇은 허리'로 잘못 말했으리라 짐작이 됩니다. 그 이야기를 한 당사자가 국어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나 보다, 뭐 이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고 무심히 지나쳤지요.
오늘 웹서핑을 하다가 다리가 너무 '얇아서' 콤플렉스 운운하는 글을 보게 되었는데, 문득 '가늘다'와 '얇다'를 구별하지 못하는 양반들이 꽤 많을지도 모르겠다는 의문이 들더군요. 구글이며 네이버에서 검색을 한번 해봤습니다. 얇은 허리' '얇은 다리' '얇은 팔' 등등.
결과는?
오호, 통재라! 부지기수로 검색되더군요. '가늘다'를 써야 마땅할 곳에 '얇다'를 쓰는 사람들이 이리도 많다니요!
(그나마 뉴스 검색 쪽에서는 잘못 쓰인 사례가 검출되지 않더군요. '며칠'을 '몇일'로 잘못 쓴 사례는 군소 인터넷 언론은 물론이고 그 잘난 조중동 기사에서도 더러 등장하는데 말이죠.)
이 글을 읽는 분 중에도 어쩌면 '가는'과 얇은'을 구별하지 못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니, 두 낱말이 어떻게 다른지 간략히 설명해보겠습니다.
'가늘다'는 '굵기'에 관한 낱말입니다. 쉽게 풀어보자면 원통형으로 생긴 사물의 둘레 치수가 작을 때 씁니다. 꼭 원통형은 아니더라도 원뿔형, 사각기둥형 따위의 물건이면 '가늘다'를 씁니다. 더 쉽게 말하자면 줄자로 둘레를 감아서 치수를 잰다면 '가늘다'를 쓴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허리, 목, 팔, 다리, 팔목, 발목, 손가락, 종아리, 허벅다리, 머리카락 등등 인체 부위는 대부분 '가늘다'를 써야 맞는 것이지요. 반대말은 '굵다'이니, 다리나 허리의 둘레 치수가 평균 이상이라면 '두꺼운 다리, 두꺼운 허리' 대신에 '굵은 다리, 굵은 허리'라고 써야겠지요.
'얇다'는 '두께'에 관한 낱말입니다. 판판한 바닥에 올려놓고 삼각자 따위로 두께의 치수를 잴 수 있는 사물에 이 낱말을 쓰는 것이지요. 책, 합판, 종이, 이불 등등이 그 예로 쉽게 떠오르네요. 인체 부위에서 '얇다'를 쓸 수 있는 곳이라면 '눈꺼풀, 얼굴 가죽' 정도일까요. 반대말은 '두껍다'가 되겠죠.
문서 검색을 해보면 재미있게도 '얇다'나 '두껍다'를 써야 맞는 곳에 '가늘다'나 '굵다'를 잘못 쓴 경우는 거의 발견되지 않더군요. '가는 종이'라거나 '굵은 사전'이라고 쓴 사례를 찾을 수 없었거든요. 그런데 반대의 사례는 서글퍼질 정도로 많이 나옵니다. '며칠'을 '몇일'로 틀리게 쓰는 분들이 많은 이유는 대충 짐작이 되는데. '가늘다, 굵다'를 써야 할 곳에 '얇다, 두껍다'를 (특히 인체 부위에서) 잘못 쓰는 경우가 많은 까닭은 도무지 알 수가 없군요.
혹시 제가 잘못 아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 지경입니다.
'얇은 허리'도 어법에 맞는 것인가요? 확실히 그렇다면 그 근거를 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맞춤법 검사기에서 확인해 보니 '얇은 허리'도 오류가 없는 것으로 나오더라는 이야기는 사양합니다. 그 검사기는 형용사를 잘못 붙인 것은 잡아주지 못하거든요.)
벽헌
2008/01/09 16:27
2008/01/09 1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