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대곡증고죽사군(錦帶曲贈孤竹使君) - 이달(李達) 작
- 錦帶曲贈孤竹使君 -
고죽에게 드리는 비단띠 노래
商胡賣錦江南市 중국 상인이 저자에서 비단을 파는데
(상호매금강남시)
朝日照之生紫煙 아침해가 비추니 자줏빛 노을이 피어나는 듯
(조일조지생자연)
美人欲取爲裙帶 미인이 가져다가 치마끈을 만들고 싶다는데
(미인욕취위군대)
手探囊中無直錢 주머니를 뒤져봐도 치를 돈이 없구나
(수탐낭중무치전)
작품 감상에 앞서 이 시가 탄생한 배경 이야기를 먼저 하겠습니다.
손곡(蓀谷) 이달 선생의 제자인 허균(許筠)은 '학산초담(鶴山樵談)'이라는 시화집(詩話集)에서 위의 시를 소개하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손곡 선생이 친구인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 선생이 사또 노릇을 하고있던 영광에 놀러갔답니다. 어여삐 여기던 기생에게 자줏빛
비단을 사주고 싶었지만 돈이 없었던 손곡 선생이 이 시를 지어서 고죽 선생에게 보내며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네요. 고죽 선생은
"손곡의 시는 한 글자에 천금의 가치가 있는데 어찌 몇 푼을 아끼겠는가"라고 하면서 글자 하나에 석 필씩 값을 쳐서 돈을
보내주었다고 합니다.
손곡 선생은 서얼 출신이라 출세길이 막혔고, 가진 재주를 써먹을 곳이라고는 시를 읊는 일
뿐이었습니다. 가슴속의 응어리를 시작(詩作)으로 승화시키며 평생을 야인으로 살면서 당대의 명문장가들 몇몇과 신분을 뛰어넘는
교분을 나누었으니, 위 이야기에 등장하는 고죽 최경창을 비롯해서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 허균의 형님인 하곡(荷谷)
허봉(許篈) 등이 그들입니다. 손곡은 우리 문학사에서 그 이름을 빼면 한시(漢詩)를 논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작품을 남긴
천재입니다만 어찌된 노릇인지 백과사전에 이름조차 올라있지 않습니다.
손곡 선생의 한시를 읽다보면 저절로 머리속에
그림 한 폭이 떠오르는 경우가 참 많은데, 소개드린 이 작품도 역시 그렇습니다. 저잣거리에서 떠들썩하게 호객을 하고있는 비단
장수 왕서방, 아침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자줏빛 비단, 그 영롱한 빛깔에 혹하여 옷감을 쓰다듬으며 정인(情人)의 눈치를
보는 아름다운 여인, 그리고 그녀에게 비단을 사주고 싶지만 주머니가 가벼워 난처해진 풍류남아. 이런 장면이 떠오르지요?
첫
구절은 이른바 운을 떼어 시의 배경을 그리는 단계가 되겠고요, 두번째 구절은 전개 부분인데 참으로 멋들어진 묘사입니다. 여인의
마음을 흔들 정도로 고운 비단의 모습을 산문으로 설명한다면 꽤나 구구한 풀이가 필요할 것입니다. 운문으로 표현하기는 더욱
어렵겠지요. 단 일곱 글자로 함축해야하고, 평측과 압운까지 맞춰야하니까요. 그런데 이 작품의 묘사는 어떻습니까? 군더더기 하나
없이 완벽하지요? 이런 것이 바로 거장의 솜씨인 듯합니다.
세번째 구절도 상상의 여지를 준다는 점에서 꽤
재미있습니다. 과연 '치마 짓게 비단 사주세요~'라고 했을지, 비단을 몸에 감아보이며 '저 예뻐요?'라고 했을지, 그저 비단을
어루만지며 마음에 쏙 든다는 표정만 지었을지 궁금해집니다. 어쩌면 손곡 선생의 주머니 사정을 이미 짐작하고 관심도 없는
척했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선생께서 여인의 심정을 헤아리고 저렇게 표현했고 말이죠. 여러분들 생각은 어떠신가요? 저는 마지막
이야기가 맘에 듭니다만...
아무튼 비단을 사주고 싶어졌습니다. 요즘 말로 하자면 지름신이 강림한 것이죠. 하지만
돈이 없군요. 여기저기 떠도는 신세인데 돈이 넉넉하면 그게 이상한 것이죠. 이 마지막 구절은 한마디로 '돈 좀 빌려줘'라는
뜻인데, 참 점잖고도 운치있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돈이란 놈은 없으면 구차해지기 십상이고, 아무리 친구 사이라고 해도 손
내밀기는 더욱 구차한 법인데 이 양반은 참 당당(?)하기도 합니다. 이런 시를 지어 보냈는데 모른척하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하지
싶네요.
고죽 선생은 기꺼이 비단값을 보냈고, 아마도 손곡 선생은 자줏빛 비단을 사서 정인에게 선물했겠죠. 그 기생이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무척이나 행복했으리라는 짐작은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벽헌
2008/04/12 10:14
2008/04/12 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