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운(呼韻) - 이달(李達) 작
- 呼 韻 -
曲欄晴日坐多時 맑은 날 굽은 난간에 오래도록 앉아서
(곡란청일좌다시)
閉却重門不賦詩 겹문을 닫아 걸고 시도 짓지 않는다
(폐각중문불부시)
墻角小梅風落盡 담장 구석 작은 매화 바람에 다 떨어지니
(장각소매풍락진)
春心移上杏花枝 봄 마음은 살구꽃 가지 위로 옮겨가누나
(춘심이상행화지)
손곡(蓀谷) 이달 선생의 한시 한 수를 이어서 소개해봅니다.
날씨가 맑게 개인 봄날, 작자는 난간에 기대어 우두커니 앉아있습니다. 문까지 닫아 걸었고, 시도 짓지 않습니다. 대체 무엇
때문일까요? 앞 두 구절을 읽으면서 드는 의문점은 뒤 두 구절에서 풀립니다. 봄을 느끼느라, 그야말로 심취하느라 그런 것이죠.
처음엔 담 구석에 핀 작은 매화꽃에 빠져있다가, 바람에 다 떨어지고 나니 봄을 느끼는 마음은 살구꽃 가지로 옮겨간답니다.
하루만에 매화가 다 떨어지고 대신 살구꽃이 피었다고 새기는 것은 좀 어색한 듯합니다. 매화가 한창일 때는 그것에 심취했었다가
매화가 바람에 날려 다 떨어져 아쉬운 마음이 생긴 찰나에 눈을 돌려보니 살구꽃이 피어오르는 것이 보이고, 마음은 저절로 그리로
옮겨간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겠지요. 운치가 차다못해 넘칠 지경입니다.
이 작품에도 재미있는 배경 이야기가 홍만종(洪萬宗)이 지은 '소화시평(小華詩評)'이라는 시화집(詩話集)에 소개되어있습니다.
손곡은 허균의 형 하곡(荷谷) 허봉(許篈) 선생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하루는 손곡이 하곡의 집에 찾아갔는데, 허균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허균은 손곡의 모습이 꾀죄죄하고 볼품이 없어서 무시하는 마음이 들었는지 곁눈으로 잠시 흝어보고는 예의도 차리지 않고
시(詩)에 대한 이야기를 멋대로 하였답니다. 한마디로 잘난체를 심하게 한 것이죠. 그러자 허봉이 "시인이 이 자리에 있는데,
너는 이분의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했느냐?"라고 하면서 이달에게 시 한 수 지어보기를 청하며 운자를 불렀답니다. 손곡이 이에
응하여 즉시 지은 절구 한 수를 지었으니, 바로 소개드린 작품입니다. 허균은 이 작품을 접하고는 얼굴빛이 변하였습니다. 그리고 벌떡 일어서서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를 하였다고 합니다.
훗날 사제지간이 된 두 천재의 역사적인 첫 만남..!
벽헌
2008/04/15 20:21
2008/04/15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