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거(幽居) - 백광훈(白光勳) 작 한시 & 한문   (2008/04/17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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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幽  居  -
            호젓하게 지내며



竟日柴門人不尋    종일토록 사립문엔 찾아오는 이 없고
(경일시문인불심)

時聞幽鳥百般吟    때때로 어디선가 온갖 새소리 들린다
(시문유조백반음)

梅花落盡杏花發    매화가 다 떨어지자 살구꽃 피어나고
(매화락진행화발)

微雨一簾春意深    가랑비 한 번 걷히니 봄 기운이 깊어지네
(미우일렴춘의심)



앞서 소개드렸던 이달(李達)의 '호운(呼韻)'과 비슷한 심상을 가진 한시 한 수를 감상해봅니다.
이달의 친한 벗 중 하나인 조선 중기의 시인 옥봉(玉峯) 백광훈의 작품입니다. 옥봉 선생은 전남 장흥 출신으로 28세라는 좀 늦은 나이에 진사가 되었고, 벼슬자리에 뜻이 없었는지 줄곧 은거하며 지냈다고 합니다. 마흔살이 넘어서 살림살이가 하도 궁핍해진 까닭으로  선릉참봉이라는 미관말직에 잠시 나아간 것이 고작이었으며, 평생 시작(詩作)을 업으로 삼으며 살았습니다. 시(詩)와 글씨로 아주 명성이 높았으며, 호남 제일의 시인이라고도 칭해졌습니다.
후대의 연구자들이 평하기를 옥봉의 한시는 서정적이고 특히 담백한 맛이 있다고들 합니다. 이 작품의 맛도 그런 듯합니다.

첫 구절은 제목인 '유거(幽居)'와 직접 연결되는 이야기겠죠. 고관대작이나 부유한 세도가의 집이라면 문지방이 닳도록 손님들이 찾아오겠지만 가난한 시인의 집엔 찾아오는 이 드문 것,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입니다. 작자는 아마도 방문을 열어놓고 책을 읽거나 시상을 떠올리며 소일하고 있었겠지요. 어디선가 '짹짹' '쪼로롱' 등등 새 우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게 두번째 구절인데, '유(幽)'자가 참 절묘합니다. 마땅히 번역할 방도가 없어서 그냥 '새'라고 해버렸는데, '유조(幽鳥)'는 소리는 들리는데 새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로 쓰였다고 보면 좋겠습니다. 한시를 읽을 때 요런 절묘한 쓰임 한 글자를 발견하는 재미도 참 좋습니다.

세번째 구절은 평범한 편이죠. 이달은 매화가 진 다음엔 살구꽃으로 춘심(春心)이 옮겨간다고 했는데, 옥봉은 그냥 자연스런 현상 정도로 넘어갔습니다. 대신 마지막 구절에서 '봄비'에 서정을 실었죠. 봄에 내리는 비는 대부분 가랑비입니다. 촉촉하게 대지를 적시는 가랑비가 한차례 내리고 나면 풀잎은 더욱 푸릇푸릇해지고 봄꽃의 자태는 더욱 아름다워지는 현상, 여러분께서도 다들 느껴보셨으리라 여겨집니다. 이것을 '춘의(春意)'가 깊어진다 표현했네요. 이 구절에서는 '렴(簾)'자에 한번 주목해봅니다. '주렴, 발' 등의 뜻을 가진 한자인데, 여기서는 가랑비가 내리는 모습이 마치 성근 발 같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듯합니다. 저는 비가 걷힌 다음으로 해석했지만, 현재 비가 내리는 중이라고 새겨보면 어떻까요? '주렴같은 가랑비 속에서 깊어지는 봄 기운' 정도로 말입니다. 이것도 괜찮죠?

찾아오는 이 없는 것을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유유자적한 삶을 즐기는 모습이 엿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자세지요. 왠지 좀 나른한 느낌도 들면서, 수묵화와 같은 담백한 느낌도 들고, 아늑하고 따사로운 봄기운이 물씬 느껴지기도 합니다. 요즘같은 봄날에 읽으면 특히 어울리는 작품인 듯해요.
2008/04/17 16:18 2008/04/17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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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람다 reply | del   2008/04/17 17:31
    사무실서 업무에 치이고 있지만은, 이 순간은 저기 앉아 있는 느낌입니다.
    벽헌님이 들려주시는 한시 맛이 일품이어용. 오홍.
    그리고 저 일하는 곳도 실은 청계산과 관악산이 보이는 곳인지라 산빛이 좋습니다욧. 노홋.
    • 벽헌 del    2008/04/17 18:25
      람다님의 망중한에 약간이나마 도움이 된건가요? 헤헤..
      산새 소리도 들리는 사무실이라면 좋겠어요.
  2. 이후 reply | del   2008/04/18 00:53
    시보다 벽헌님의 한자 풀이에 더 눈을 반짝이고 듣습니다.
    .... 오늘은 거의 5월의 신록이더군요. (또 긁어가도 미워하시지 않겠죠?)

    원고 쓰다 기진한 상태에서 읽었는데도 머리가 맑아지네요. 감사^_^*
    • 벽헌 del    2008/04/18 04:52
      미워하다니요!! 고맙기만한걸요.
      그리고, 한자 풀이가 마음에 드신다니 참 다행이에요. 앞으로도 한시 소개하면서 한자의 멋진 쓰임새 쪽으로 신경을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3. 별하나 reply | del   2008/04/20 08:44
    안뇽`*

    그런데,한자 풀이를 벽현님이 하셨떠영 ㅡㅡ?

    흠흠..읽을때 정신을 똑바루 차리구 읽거꺼던여 ㅡㅡ^
    머시떠요;;
  4. 에드 reply | del   2008/05/11 09:57
    비는 오지 않았는데 2틀간 바람이 굉장히 많이 불어서 공기가 깨긋해졌답니다 꼭, 비가 온것 처럼 말이에요^^
    제가 사는곳은 송림, 솔나무가 뒷산에 많은 동네에요 그래서 사실 지금껏 소나무꽃가루 송홧가루가 날아다녀 온 사방천지가 노란색들이었어요^^ 새삼 햇살도, 공기도, 바람도 봄바람인것 같아 마음이 유유자적이 되었답니다 위 시처럼 말이죠~ 헤헤~ ^--^

    '기재기이'를 읽었어요~
    그곳에 나온 문구들, 단어대입이나, 풍류등이 벽헌님의 한시들을 읽는듯해 기분이 참 좋았어요
    "아... 이 문구는 벽헌님은 이렇게 해석하시겠지???" 유추하면서 말이죠~ 흐흐^^
    그 책을 읽으면서 아... 이 한시나 한문을 공부할려면 정말 방대한 내용을 알아야 되겠구나... 실감을 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