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거(幽居) - 백광훈(白光勳) 작
- 幽 居 -
호젓하게 지내며
竟日柴門人不尋 종일토록 사립문엔 찾아오는 이 없고
(경일시문인불심)
時聞幽鳥百般吟 때때로 어디선가 온갖 새소리 들린다
(시문유조백반음)
梅花落盡杏花發 매화가 다 떨어지자 살구꽃 피어나고
(매화락진행화발)
微雨一簾春意深 가랑비 한 번 걷히니 봄 기운이 깊어지네
(미우일렴춘의심)
앞서 소개드렸던
이달(李達)의 '호운(呼韻)'과 비슷한 심상을 가진 한시 한 수를 감상해봅니다.
이달의 친한 벗 중 하나인 조선 중기의 시인 옥봉(玉峯) 백광훈의 작품입니다. 옥봉 선생은 전남 장흥 출신으로 28세라는 좀
늦은 나이에 진사가 되었고, 벼슬자리에 뜻이 없었는지 줄곧 은거하며 지냈다고 합니다. 마흔살이 넘어서 살림살이가 하도 궁핍해진
까닭으로 선릉참봉이라는 미관말직에 잠시 나아간 것이 고작이었으며, 평생 시작(詩作)을 업으로 삼으며 살았습니다. 시(詩)와 글씨로 아주 명성이 높았으며, 호남
제일의 시인이라고도 칭해졌습니다.
후대의 연구자들이 평하기를 옥봉의 한시는 서정적이고 특히 담백한 맛이 있다고들 합니다. 이 작품의 맛도 그런 듯합니다.
첫 구절은 제목인 '유거(幽居)'와 직접 연결되는 이야기겠죠. 고관대작이나 부유한 세도가의 집이라면 문지방이 닳도록 손님들이
찾아오겠지만 가난한 시인의 집엔 찾아오는 이 드문 것,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입니다. 작자는 아마도 방문을 열어놓고 책을
읽거나 시상을 떠올리며 소일하고 있었겠지요. 어디선가 '짹짹' '쪼로롱' 등등 새 우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게 두번째
구절인데, '유(幽)'자가 참 절묘합니다. 마땅히 번역할 방도가 없어서 그냥 '새'라고 해버렸는데, '유조(幽鳥)'는 소리는
들리는데 새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로 쓰였다고 보면 좋겠습니다. 한시를 읽을 때 요런 절묘한 쓰임 한 글자를 발견하는 재미도 참 좋습니다.
세번째 구절은 평범한 편이죠. 이달은 매화가 진 다음엔 살구꽃으로 춘심(春心)이 옮겨간다고 했는데, 옥봉은 그냥 자연스런 현상
정도로 넘어갔습니다. 대신 마지막 구절에서 '봄비'에 서정을 실었죠. 봄에 내리는 비는 대부분 가랑비입니다. 촉촉하게 대지를
적시는 가랑비가 한차례 내리고 나면 풀잎은 더욱 푸릇푸릇해지고 봄꽃의 자태는 더욱 아름다워지는 현상, 여러분께서도 다들
느껴보셨으리라 여겨집니다. 이것을 '춘의(春意)'가 깊어진다 표현했네요. 이 구절에서는 '렴(簾)'자에 한번 주목해봅니다.
'주렴, 발' 등의 뜻을 가진 한자인데, 여기서는 가랑비가 내리는 모습이 마치 성근 발 같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듯합니다. 저는
비가 걷힌 다음으로 해석했지만, 현재 비가 내리는 중이라고 새겨보면 어떻까요? '주렴같은 가랑비 속에서 깊어지는 봄 기운'
정도로 말입니다. 이것도 괜찮죠?
찾아오는 이 없는 것을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유유자적한 삶을 즐기는 모습이 엿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자세지요. 왠지 좀 나른한 느낌도 들면서, 수묵화와 같은 담백한 느낌도 들고, 아늑하고 따사로운 봄기운이 물씬 느껴지기도 합니다. 요즘같은 봄날에 읽으면 특히 어울리는 작품인 듯해요.
벽헌
2008/04/17 16:18
2008/04/17 1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