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4월 13일 작성]
저의 네이버 아이디인 atheist는 '무신론자'라는 뜻입니다. 십여년 전 피씨통신에 입문하면서 만들었던 것이니 사이버 세계에서 처음으로 만들어본 아이디이기도 하고, 저의 주 아이디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무신론자는 아닙니다. 신이 존재하는지의 여부는 모르겠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부정하는 것도 긍정하는 것도 아니니 무신론자는 아닌 셈이지요. 저는 신을 믿지 않는다는, 다시 말하자면 존재의 여부를 떠나 신앙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생각하고 사용하고 있습니다.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해도 되겠지요.
제가 종교를 갖지 않는 이유는 많고도 많지만 한마디로 줄인다면 '믿기가 싫어서'일 것입니다. 혹시 신이 친히 제 앞에 현신한다고 해도 信(신)은 하되 仰(앙)은 하지 않겠다는 생각도 갖고 있습니다.
트랙백으로 엮어놓은 글은 기독교도의 시각으로 본 영화 'Passion of Christ'에 관한 포스트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지 못했고, 앞으로 반드시 보아야겠다는 생각도 갖고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마구 때리고 고문하는 장면은, 특히 그것이 사실적일수록, 그다지 즐기지 않거든요.
그러니, 보지도 않은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트랙백한 포스트 초반 부분에 있는 한 문장을 읽고 느꼈던 일종의 충격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인용해봅니다.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받았던 그 감동을 있는 그대로 고백하면 공격받을까봐, 부인당할까봐, 기독교인으로서 자기 신앙을 밝히는 동시에 늘상 받게 되는 그 무수한 비판 혹은 비난이 아예 미리부터 두려웠던 까닭에, 뭔가 이야기를 하고는 싶은데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는 꺼려져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포장해서 가리고 주변부만 돌기로 스스로와 타협한 글이었기 때문이다.
앞에 信하되 仰하지는 않는다는 말에서 눈치를 채셨겠지만 저는 종교적으로는 무척이나 오만한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 주인은 나 자신일 뿐이니, 누구의 종이 되지도 않을 것이며, 누구를 주(主)라고 부르지도 않을 것이라는 고집입니다. 이런 생각을 갖고있으니 교인들이 우습게 보이는 것도 당연할 것입니다. 저는 절대자를 믿는 것은 뭐라고 변명을 하고 이유를 붙이든 나약함의 증거라고 생각했었고, 올바른 신앙 생활이 쉽지 않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아무데도 기댈 곳이 없이 혼자서 양심을 지키는 어려움보다 더하겠느냐고 생각했습니다. 종교란 인간의 나약함에서 나온 산물일 뿐이고, 진짜로 강한 의지는 믿음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인용부를 읽는 순간 그렇지 않을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을 갖는 것이 구원인 동시에 형극일 수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다고나할까요. 신앙이 나약함의 증거라는 저의 생각이 잘못이었음을 인정하고 반성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첫번째 고백입니다.
또, 저는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두려움일 수 있다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 비난을 받을 위험성을 느끼게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실제로 그러한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사자가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것이 요점입니다. 경험이 있거나, 적어도 두려움을 가질만한 근거가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부터도 말로 글로 여기저기서 기독교를 비난하고 비판해왔습니다. 특히 진정성이 없이 저에게 포교하려는 사람은 가만 놔두지를 않았습니다. 마치 경찰이 일제검거에 나서서 검거 건수를 늘리려는 것과 비슷하다는 기분이었거든요. 달리 말하자면 정말 저를 불쌍히 여겨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포교인 것이 매우 맘에 들지 않았다는 얘깁니다. (포교의 의무라던가 그런 것이 있다고 알고 있는데 아니라면 정정을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그들의 입에서 저주의 말이 나오고 사탄의 종자라는 욕이 들릴때까지 싸워주었습니다. 마무리는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을 믿는 교인의 입에서 그게 나올 말이냐고 빈정거려 주는 것으로 마감했었지요.
글로 기독교를 비난한 일도 셀 수 없을만큼 많습니다. 수틀리면 싸워준다가 신조였으니까요.
사실 욕을 먹어도 싼 종교인들도 많고, 그중에는 개돼지보다 못한 놈들도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에 문제가 많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극히 선량한 교인들 역시 많으며, 묵묵히 봉사와 헌신으로 살아가는 분들도 많이 계실 것입니다. 그들이 쉽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을 따르기 때문이겠지요. 또 나쁜놈들은 쉽게 눈에 보이는 법이고요.
우리들, 아니 저는 그동안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기독교도를 싸잡아 비난했습니다. '일부'라는 낱말을 반드시 붙여서 빠져나갈 구멍을 교묘하게 만들어놓고 말입니다. 나는 그 '일부'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여기면 그만이겠으나 과연 다른 것도 아닌 신앙의 문제에서 자신있게 '일부'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할 수 있었을까요? 또 그렇다고해도 남의 일로 치부해버리고 마음 편할 수 있었을까요? 모르긴 몰라도 외국인이 우리나라의 낙후함을 비난하는 것을 듣는 것과 비슷한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비난과 비판들이 모여서, 한 선량한 기독교인에게 두려움으로 다가온 것이겠지요. 글쓴이의 신앙이 얼마나 돈독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선량한 교인인 것은 분명할 것입니다.
게다가 저의 무기는 논리였습니다. 신앙이란 무조건적 믿음이 우선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결코 논리적으로는 해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정당하지 못했다고 생각됩니다.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들 중에도 나쁜 인간들은 많습니다. 그렇다고 아무도 비종교인들을 싸잡아서 비난하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종교인 중에 나쁜 인간들이 있다고해서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싸잡아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이겠지요. 제가 신을 믿지않을 자유를 가지고 있고 그것이 존중되기를 바란다면, 교인들에게도 신앙을 가질 자유는 보장되어야하며 그들의 신앙은 존중받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저는 이 뻔한 사실을 알면서도 저는 일부러 모른체했던 것 같습니다. 이점을 인정하고 반성합니다. 이것이 두번째 고백입니다.
그런데 문득 화가 좀 나는군요. 교단의 우두머리들에게 말입니다. 교세를 넓히는 것에 신경을 쓰는데 앞서서 자기들 집안 청소부터 해야하는 것이 순리가 아닐까요? 욕을 먹도록 만드는 인간들을 단속하고 자기들이 솔선수범하여 모범을 보이고, 나아가 모든 교인들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도록 만든다면 비난받을 일도 없거니와 결국은 그것이 비종교인들을 품 안에 끌어들이는 바른 길이 될 것인데 말입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외부인인 비종교인들이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들이 어려움이나 기타 등등의 핑계로 잘못된 것을 바로잡지 않음으로서 아무 잘못도 없는 선량한 어린양이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냐는 말씀입니다.
더 하다간 또 비난하는 얘기가 될 듯하니 여기서 줄입니다.
제게는 저를 길 잃은 어린양으로 여기고있는 친구가 하나 있습니다. 이 친구는 제게 성경도 사주었고, 저를 주님의 품으로 끌어들이려고 애를 좀 씁니다. 이 친구와 종교 이야기를 하면 싸울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염려하고 있다는 것을 제가 알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위한 포교가 아니고 오직 저만을 위한 설득이라는 것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기에 비록 아직 넘어가지는 않았지만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든 교인들이 이 친구만 같다면 제가 욕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이런 글을 쓸 일도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드는군요.
그 친구에게 고맙고 한편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덧붙여둡니다.
마지막으로 트랙백한 포스트와 거기 매달린 덧글 등등을 읽다가 한가지 조금 의외로 느껴졌던 부분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가 가시면류관을 쓴 것이 아팠겠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저는 이것이 좀 의외였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처음 가시면류관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얼마나 고통스러울까라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손에 못이 박히는 이야기는 더했습니다. 제 손에 못이 박힌다는 상상을 하고서 그 끔찍한 고통을 어떻게 견디어냈을까, 몸서리를 치곤 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가시관이니 십자가를 지고 산을 오르느니 손발에 못질을 당하느니 하는 이야기는 보고 들을 때마다 소름이 끼칩니다. 비종교인인 제가 그런데 신앙인은 처음(가시관만 그렇겠지요)이라는 것이 좀 이상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해가 될 듯합니다. 교인이기에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성화(聖化)하여 받아들여왔을 것이고, 저는 그저 공자와 비슷한 격의 성인으로, 신격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인간으로 여기고 있으니 어쩌면 가시관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이 다른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뭐랄까... 신격화되었기에 그 고통은 인간의 그것으로 느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것.
어쩌면 멜깁슨이 영화에서 보여주고자 한 것도 그것일 수 있겠다는 엉뚱한 상상을 해봅니다.
신의 아들이기에 앞서 한 인간으로 맞서야 했던 고통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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